경관 가치
신주 도성황묘(新竹都城隍廟)는 신주의 3대 사당 중 하나이다. 청나라 시기에 이미 타이완 전국에서 유일한 성급 성황묘가 되었으며, 일제시기에 재건을 거치면서 당시 명장의 많은 작품을 보유하게 되었다. 석조, 목조, 용 기둥, 돌 사자, 수문장, 현판, 대련, 조정 모두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중 삼천전 앞에 위치한 청두석 돌 사자상은 타이완 우정(邮政) 역사상 최초로 돌사자 우표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유구한 역사를 가진 주첸 중원 성황제(竹塹中元城隍祭)는 중원 구제 행사가 변화한 것으로 옛 예법 그대로 진행되는 의식이다. 이는 풍부한 문화적 함의와 지방적 특색, 민속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과 동시에 타이완의 각 성황묘 중 가장 큰 총체적 기복 행사라 할 수 있다.
역사 연혁
청나라 건륭제 12년인 1747년, 단수이의 관원이던관원이던 청웨잉(생년 미상~17531753년)이 주첸에 단수이청을 둘 것을 결의하고 성황묘를 건설하기 시작해 다음 해에 건설을 완료했다. 당시 신주 성황은 관례에 따라 ‘청성황(廳城隍, 현급 성황), 현우백(顯佑伯)’이라고 불렸다. 1875년, 타이베이가 타이베이부로 승격되었고 원래의 신주 단수이청을 그대로 사용하도록 하면서, 신주 성황 또한 ‘부성황(府城隍), 수정후(綏靖侯)’로 승격되었다. 이후 타이베이부의 부성은 1878년에 멍자(지금의 완화구)로 옮겨졌다. 1891년, 청나라 조정은 민간에 떠도는 천재지변의 풍문에 대응하기 위해 신주 성황묘에서 재앙을 막는 액막이 법회를 거행하도록 했으며, 신주 성황을 ‘도성황(都城隍), 위령공(威靈公)’으로 봉했다. 이는 당시 타이완 전국에서 유일한 성급 성황묘였다. 일제시기인 1924년에는 낡아서 훼손된 성황묘의 재건을 진행했으며, 베이먼 현지의 정씨정씨 일가가 수리자금을 조달하였다. 이 재건 공사를 통해 현재와 같은 예스럽고 소박한 모양의 사찰로 재건할 수 있었으며 신주 죽연사, 신주 장화궁과 함께 신주 3대 묘로 불려지게 되었다. 1985년에 신주시 지정 유적으로 선정되었다. 유명한 주첸 중원 성황제(竹塹中元城隍祭)는 성황묘의 중원 구제 행사가 변화 발전한 것이다. 외로운 혼을 구제하는 성황야의 행차, ‘항가해액(夯枷解厄)’ 법회 등이 옛 법도를 따라 차례로 진행되며, 수천 명이 칼을 쓰고 행진을 하면서 신에 대한 경건한 믿음을 나타내는 매우 성대한 장면을 보여준다. 주첸 중원 성황제(竹塹中元城隍祭)는 2009년 신주시 민속 행사로 등록되었다.
특색 가이드
1삼천전의 돌사자
신주 성황묘의 삼천전 앞에 있는 돌사자는 취안저우 후이안 황탕에 있는 위창호(玉昌湖)의 청두석(Bluestone)을 사용한 것으로, 최상품 석재라 할 수 있다. 푸저우에서 장인들을 초빙하여 세밀한 석조를 표현해 냈으며, 청록색의 재질과 광택이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은 생생한 모습을 그려낸다. 석재의 표면은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반질반질한 광택을 가지게 되었다. 돌사자는 그 귀여운 모습으로 중화우정공사 역사상 최초로 만들어진 돌사자 우표의 주인공이 되었다.
2삼천전의 팔괘 조정신주 도성황묘(新竹都城隍廟)는 일제시기인 1924년에 재건할 당시 취안저우 후이안에서 초청한 목공장인 왕이순(1861년~1931년)이 재건을 감독했는데, 그의 작품 중 삼천전에 위치한 팔괘 조정은 매우 복잡하고도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현재는 향 연기로 그을려져 있지만, 그 정교하고 세밀한 아름다움은 전혀 퇴색되지 않았다.
3‘금문보장’ 현판
청나라 시대인 1887년, 신주 지역에 가뭄이가뭄이 들었다. 신주의 지현(知縣, 명청 시대의 현의 일급 행정 수장)이었던 방쭈인(생몰년 미상)은 신주 도성황묘(新竹都城隍廟)의 성황야, 용왕묘의 용왕, 죽연사의 관세음보살에게 기우제를 지냈고, 그대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순무(巡撫. 청나라 시대의 지방 행정 장관)인 류밍촨에게 광서 황제에게 보고를 올릴 것을 청하였고, 다음 해 신령함을 나타내는 ‘금문보장’이라는 현판을 하사받았다. 현재 이 현판은 정전 높은 곳에 걸려 있으며, 비를 바랐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 현판은 죽연사의 ‘대해자운(大海慈雲)’ 현판과 같이 금종이에 검은 글자로 새겼으며새겼으며 금종이 바탕에는 쌍용이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조각되어 있어 매우 희귀한 것이다. 또한 양옆에는 현판을 수호하는 금룡 한 쌍이 배치되어 있다.
4마지막 황제 푸이의 어필: ‘정직’, ‘총명’ 네 글자정전의 대들보 위에 있는 ‘정직’, ‘총명’이라는 네 글자는 타이완 전국에서 유일한 마지막 황제 푸이(1906년~1967년)의 어필이다. 당시 만주국의 초대 외교부 총장에 취임하여 일등 욱일대수장 훈장을 받은 신주 출신의 셰제스(1878년~1954년)가 요청한 것으로, 성황묘 내에 위치해 있다가 제2차 세계대전 후(1945년) 행방이 묘연해졌다. 현재는 복제판만이 남아있다.
5삼천전 용 기둥삼천전 앞뒤의 처마 끝에는 용 기둥 한 쌍이 배치되어 있다. 이는 일제 다이쇼 시기에 성황묘를 재건할 당시 유명한 후이안의 석공 명장 신아주(1886년~1928년)가 만든 것으로 흑회색의 안산암(Andesite)을 재료로 윗부분의 팔각형 기둥머리가 돌기둥과 아랫부분의 팔각형 주춧돌까지 이어진다. 머리를 아래쪽에, 꼬리를 위쪽에 두고 기둥을 감고 있는 모양의 용이 완만한 곡선으로 이어져 있어 조각에 깊은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6주첸 중원 성황제(竹塹中元城隍祭) 일정주첸 중원 성황제(竹塹中元城隍祭)는 매년 음력 6월 28일부터 귀문(鬼門)이 닫히는 7월 30일 날까지 약 한 달 여간 진행되며 일정은 다음과 같다 : 1. 6월 28일: 음양사공(성황야를 보좌하는 도교의 신)을 감실에서 내어 온다. 2. 7월 1일: 귀문 열기, 음양사공을 북쪽 제단으로 옮기고 ‘칼 쓰기, 칼 벗기’ 의식을 진행한다. 3. 7월 12일: 성황야를 감실 밖으로 꺼내고 행차를 준비한다. 4. 7월 13일: 성황야의 대소야(大少爺), 이소야(二少爺)가 비밀 순행(암방)을 나간다. 5. 7월 15일: 외로운 혼을 구제하는 행차를 진행한다. 정씨 가문의 사당을 방문하는 정조공연(鄭厝貢燕) 의식을 진행한다. 6. 7월 16일: 성황야 행차 의식 7. 7월 19일: 성황 구제 의식 8. 7월 20일: 성황이 사당으로 돌아온다. 9. 7월 30일: 귀문 닫기.
7항가해액(夯枷解厄)
주첸 중원 성황제(竹塹中元城隍祭)는 매년 음력 7월 1일 오후에 열리는 ‘항가해액’ 행사로 시작된다. 수많은 신도들이 죄인을 묶어 두는 종이 ‘칼’을 어깨 위에 쓰는데(‘항가’라는 것은 죄인을 흉내 내어 형구를 목에 쓰는 것으로, 인간에게 ‘원죄’가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칼을 벗어내는 의식을 통해 성황야에게서 죄를 사면받고 과거의 업을 행운으로 바꾸는 것이다.
8정조공연(鄭厝貢燕) 의식주첸 중원 성황제(竹塹中元城隍祭)는 음력 7월 15일에 성황이 외로운 혼을 구제하는 행차를 하면서 최고조에 이른다. 성황야는 신주 시내를 행차하며 베이먼가에 있는 정씨 집안의 사당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에서 정씨 가문의가문의 자제들이 진상한 차를 받고 얼굴을 씻는다. 이를 정조공연(鄭厝貢燕)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풍습은 타이완에서 제일 처음으로 진사에 합격한 주첸 베이먼의 정융시(1788년~1858년)가 1828년의 도성황묘 재건 시에 큰 공헌을 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씨 집안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도성황야가 행차할 때 정씨 일가의 사당에서 휴식을 취하며 정조공연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성황야의 얼굴을 씻은 물은 평안을 가져다준다는 말이 있어 많은 신도들에게 인기가 있다.
주의 사항
음력 7월 1일 오후의 항거해액 의식에 참가하려면 반드시 먼저 사당 측에 등록해야 한다. 음력 7월 13일 저녁, 도성황야의 대소야와 이소야가 횃불을 들고 진행하는 암방 행사에도 참가 등록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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