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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신푸 포충정의민묘

타이완 최대의 하카족 신앙 중심지
신푸 포충정의민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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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소: 신주현신푸진샤랴오리 이민로 3단 360호
경 위 도: 121.03627,24.84335
입장료:
개방기간:
연중
개방시간:
종일
주관 기관: 재단법인 타이완성 신주현 포충정
주관 기관 홈페이지: 
E-mail: HsinPu.YiMinjosshouse@gmail.com
문의전화: (03)588-2238

경관 가치

포충정의민묘는신푸 포충정의민묘(新埔褒忠亭義民廟)는 타이완에서 가장 대표적인 하카족의 의민묘로써, 타이완 의민 신앙의 중심지이다. 1945년 타이완 광복 후 북부 지방의 하카인들이 다시 바깥 도시로 이주함에 따라 의민 신앙 또한 각지로 퍼져 나갔다. 타이완 전국의 많은 의민묘는 포충정의민묘를포충정의민묘를 본산으로 한다. 또한 타이완에서 연장(청나라 시대에 몇 개의 마을이 연합하여 함께 치안을 관리하는 제도)에 근거한 신앙의 규모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사당 내 많은 현판 또한 큰 특색 중 하나이다. 특히 청나라 시대에 하사받은 ‘포충’과포충’과 일제시대 타이완 총독 하세가와 기요시의 ‘진충보국’ 현판은 모두 사당의 중요 문물이다.

역사 연혁

포충정의민묘는신푸 포충정의민묘(新埔褒忠亭義民廟)는 타이완 북부 하카족의 공통 신앙 중심지이다. 청나라 건륭 51년인 1786년, 조정은 천지회(반란 조직)를 진압하기 위해 힘썼다. 임상문(1756년~1788년)은 백성들에게 저항을 호소하며 난을 일으켰고, 그의 북로부대는 단수이를 함락한 후 육장리장(현재 주베이 류자 지역)으로 진군했다. 현지 유력인사였던 임선곤(1725년~1806년)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의민부대를 조직하였고 관병을 도와 반란을 평정했으나, 불행히도 전투 중 200여 명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반란이 평정된 후 목숨을 잃은 의민들의 유해를 매장한 후 ‘대총’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청나라 건륭황제는 반란 진압 중 힘과 자원을 공한 의민들을 치하하고자 ‘포충포충’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지방의 세력가들은 사단을 건립하여 이를 모시고자 하였고 1786년 겨울에 건립을 시작하여 2년 후에 낙성되었다. 1835년, 의민묘의 제사 책임자가 ‘칙봉월동의민사전부칙봉월동의민사전부(敕封粵東義民祀典簿)’라고 하는 규약집을 작성하였으며 타오위안과 신주 지역 하카 사람들이 공통으로 제사 의식에 참여하는 풍습을 확립하였다. 의민묘는 2006년에 신주현 지정 유적으로 등록되었다.

특색 가이드

신푸 포충정의민묘평면도에 【100대 명승지 명칭】각 항목이 표시되며, 안내 항목은 총 4개가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1포충정포충정 패루

褒忠亭牌樓 신푸 포충정포충정 파출소 앞에서 계단을 올라가면 화려한 색감을 가진 웅장한 ‘포충정포충정’ 패루가 서 있다. 패루 위에는 ‘성인(成仁)’, ‘취의(取義)’라는 문자가 걸려있다. 패루 앞면의 문미 위에는 오만연방(五彎連枋)이라는 공법을 사용한 두공이 구성되어 있다. 원형의 두를 층층이 쌓아 패루 앞면에 입체감과 화려함을 더해주고 있다. 문 앞 양옆의 돌사자는 건립 당시의 작품으로 청두석을 조각한 것이다. 왼쪽이 수사자이며, 오른쪽이 암사자이다. 사자는 적당한 크기의 체형을 가지고 있으며, 조각선 또한 매우 매끄러워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2대총과대총과 부총

「粵東褒忠義民之總墓」大塚 사당 뒤편에는 매우 넓고, 녹색 풀이 무성히 펼쳐져 있는 의민묘 두 개가 있다. 하나는 1784년에 세워진 것을 일제시대인 1923년 여름에 재건한 ‘월동포충의민지총묘월동포충의민지총묘(粵東褒忠義民之總墓)’ 대총이다. 임상문의 난 평정에 참가했다 전투 중 목숨을 잃은 하카 사람들이 묻혀있다. 청나라 조정은 반란 평정에 함께 공을 세운 의민부대를 치하하기 위해 어명을 선포하여 ‘포충포충’ 현판을 하사하며 칭송했다. 당시 선봉에 섰던 임선곤은 칙명을 받은 후 의민들의 유해를 함께 매장하고 오래도록 기념하도록 했다. ‘지령인걸(地靈人傑)’이 새겨진 또 다른 무덤 하나는 현지 사람들에게 부총이라고부총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청나라 동치시대인 1862년, 대조춘(戴潮春)의 반란을 평정한 의민들의 유해가 묻혀 있다.

3‘포충포충’과 ‘진충보국’ 현판

「褒忠」匾額 청나라 건륭황제는 관군과 협력하여 임상문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운 타이완 의민을 기념하기 위해 친히 어필로 ‘포충포충(褒忠)’과 ‘정의(旌義)’라는 현판 두 개를 써서 신주 하카 의민묘와 주뤄(자이의 옛 지명) 민난 의민묘에 각각 하사하였다. 그 중 ‘포충포충’ 현판은 포충정의민묘포충정의민묘 정전 위에 걸려있다. 하카족의 정신은 이 ‘포충’이포충’이 대표하는 충의 정신으로 그려낼 수 있다. 현판은 또한 의민묘의 대표적 상징물이 되었다. 또 다른 중요 문물은 ‘진충보국’ 현판이다. 일제시대인 1937년, 일본 정부가 황민화 운동을 펴자 타이완 총독인 고바야시 세이조(1877년~1962년)는 한 도시에 한 사당만을 남기는 정책을 실시하였고, 포충묘포충묘 또한 철거 대상으로 꼽히자 백성들의 반발이 일었다. 뒤 이어 총독으로 재임하게 된 타이완 총독 하세가와 기요시(1883년~1970년)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특별히 ‘진충보국’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4의민 문화제

義民文化祭典 매년 음력 7월에 열리는 의민 문화제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의민야 신앙의 중대사이다. 청나라 1788년에 사당이 낙성된 후 연장 축제가 열렸는데 초기에는 임선곤 등의 4가지 성을 가진 대표들이 순서대로 제사를 담당했다. 1835년에는 신주, 타오위안 등의 신도들이 함께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제사권 또한 13개 마을로 확대되고 일 년에 한 번씩 돌아가며 제사를 지낼 것을 확정하였다. 같은 해 ‘칙봉월동의민사전부칙봉월동의민사전부(敕封粵東義民祀典簿)’ 규약을 제정하였다. 1976년에는 제사권이 15개의 마을로 더욱 확대되며 전례 없는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고 포충정의민묘포충정의민묘 또한 타이완 최대의 하카 신앙 중심지가 되었다.

주의 사항

매년 음력 7월 20일의 의민 문화제는 하카족 문화를 가장 잘 대표하는 행사이다. 먀오청 광장에 신도들이 정성껏 준비한 제사 물품이 놓이며 매우 성대한 축제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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