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 가치
윈린 지역의 중요 마조 신앙 중심지 중 하나인 투쿠 순천궁(土庫順天宮)은 일제가 황민화 정책을 펼칠 시기에 재건 책임자를 맡았던 시노사키 기요시의 노력으로 철거의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 이 당시에는 훗날 유명해진 ‘윈린 육방마 화로 건네기’ 행사를 잘 보존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양식의 장식 예술품을 순천궁에 잘 융합했다. 현재 후전에서는 여전히 일본 관음보살 신상을 모시고 있는데, 신상의 일본식 조형은 타이완에서 매우 보기 힘든 것으로 타이완이 겪은 일제 통치를 증명하는 구체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재건 시에는 석조의 장주(蔣九)와 장취안(蔣泉), 목조 대장작의 후셴(胡賢)과 왕진무(王錦木), 교지도와 전점의 천톈치(陳天乞) 등 당대 명장들이 솜씨를 겨루었으며 작품 또한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어 높은 문화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역사 연혁
투쿠 순천궁(土庫順天宮)은 청나라 순치 시대(1644년~1661년)에 창건되었다. 이후 1834년에 신도들이 토지를 기증하고 상업조합이 자금을 모아 전전을 건축하고 천상성모를 모셨다. 6년 후에는 후전을 지어 관세음보살을 모셨으며 이후 오른쪽 곁채를 증축해 오늘날의 사당 구도가 완공되었다. 일제시대인 1940년에는 일본 정부가 황민화 정책을 실시하면서 더우류군 (斗六郡)과 후웨이군 (虎尾郡) 관할의 모든 사당을 일제히 철거할 것을 명령했다. 당시 순천궁의 재건 책임자였던 시노사키 기요시(생몰년 미상)는 순천궁의 재건이 헛수고가 될 것을 우려하여 순천궁이 일본의 ‘고의 진언종 타이완 개교 계획안(古義真言宗台灣開教計畫案)’에 이름을 올릴 수 있도록 했다. 또한 1939년에 일본 길상사의 주지 스님인 구로사와 유키(생몰년 미상)에게 일본 군마현 닛타군의 길상사의 33번 일본 관음상을 순천궁 정전으로 모시고 올 것을 청했다. 이에 따라 정전의 신상과 윈린현 신도들이 독실하게 믿고 있던 ‘육방천상성모’ 신상은 후전으로 물러났으며 안전하게 보존되었다. 시노사키 기요시는 재건 과정에 각지의 장인들을 참여시켰다. 석조 작품에는 후이안 출신의 석공 명장, 투쿠진의 장주(蔣九, 생몰년 미상)와 펑위안의 장취안(蔣泉, 생몰년 미상)이 솜씨를 겨루게 했으며, 목조 작품에는 장파 명장 천잉빈(陳應彬, 1864년~1944년)의 제자 후셴(胡賢, 생몰년 미상)과 탕산 사부 왕진무(王錦木, 1909년~1996년)가 대장작(장인들이 각각 건물의 다른 부분을 맡아 경쟁을 하듯 작품을 만든 것)으로 참여하였다. 교지도와 전점은 북부 지역의 명장인 훙쿤푸(洪坤福, 1865년~?)의 대제자 천톈치(陳天乞, 1906년~ 1990년)의 작품이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성모는 정전으로 돌아왔으며 육방천상성모는 예전의 풍습 그대로 다섯 마을의 관리인들이 교대로 모시게 되었다. 순천궁은 2012년에 윈린현 지정 유적에 이름을 올렸다.
특색 가이드
1교지도로 꾸며진 희도(戲堵)
순천궁 정전과 배전 두 곳에 있는 수차도(水車堵)는 일제시대에 시노사키 기요시가 재건을 하면서 명장 홍쿤푸의 대제자 천톈치를 초청하여 만들도록 요청한 것이다. 천톈치는 이곳에 전점과 교지도 작품을 남겼는데 작품의 주제는 요순, 봉신방과 삼국연의 등 역사와 민간 이야기에서 가져온 것이다. 향 연기에 많이 그을리긴 했지만 여전히 당시 장인이 뽐낸 공예 기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윈린현에 있는 교지도 중 가장 보존이 잘 된 작품이다.
2정전 용호도(龍虎堵)의 서예와 채색화
정전 좌우 벽 위에 있는 용호도는 1852년에 다추톈바오의 서예가 마룽루이(馬龍瑞)가 순천궁의 재건 완료를 축하하기 위해 남긴 귀한 서예 작품이다. 용도는 붓이 아니라 벼 이삭을 사용해 쓴 것이며 ‘연비월굴지, 어약해중천(鳶飛月窟地,魚躍海中天)’이라는 글귀가 고풍스러우면서도 힘 있게 쓰여 있다. 호도는 교룡(蛟龍)을 그린 채색화로, 호도에 호랑이를 그려 넣는 일반적인 전통 사당과 차이점을 보인다. 중화권 사람들은 ‘서화(書畫)’라는 명칭의 순서와 같이 그림보다 글을 더 높게 평가했으며 왼쪽(용의 방향)을 더 높은 자리라 여겼다. 따라서 서예가 왼쪽인 용도에 위치해 있다.
3후전에 있는 군마현 길상사의 일본 관음상투쿠 순천궁(土庫順天宮) 후전 감실 한 가운데에는 일본에서 온 목조 관음상 1기가 있다. 이는 일제가 황민화 정책을 펼칠 시기에 순천궁의 재건 감독자였던 시노사키 기요시가 철거를 피하고자 1940년, 일본 진언종 고의파 길상사의 주지 스님인 구로사와 유키에게 교사이자 지부장을 맡게 하고, 일본 군마현 닛타군 길상사에서 일본 관음상 1기를 모시고 올 수 있도록 했다. 이 일본 관음상은 전쟁이 끝난 후 후전에 다시 모셔졌다. 불상의 크기는 약 1척 2(38cm)이며 두 손은 합장하고 있다. 매우 장엄한 얼굴을 하고 있어 일반적인 중화권 사당에서 볼 수 있는 관음 불상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등 뒤에는 배 모양의 배광이 있으며 좌대에는 33번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4천정의 수재(豎材)와 조통(吊筒)
순천궁 삼천문 뒤 천정의 수재와 조통 위에는 사농공상을 대표하는 4명의 일본인 모양의 목조 조각이 있다. 그중 일본 게다를 신고 있는 인물 조각의 모습은 타이완 내에서 처음 나타난 설계로, 일제시대에 순천궁을 재건할 당시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보여준다.
5도광시기에 제작된 옛 제사상
후전에 있는 옛 제사상은 청나라 도광 14년(1834년)에 장화현 얼린향의 신도인 훙위원(洪郁文)이 바친 것이다. 누가 만든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표면에 많은 신수와 길상물들이 조각되어 있다. 세밀하고 매끄러우면서도 고색창연한 모습은 순천궁 재건시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주의 사항
투쿠 순천궁(土庫順天宮)이 가장 성황을 이루는 때는 음력 3월 23일의 마조 탄신일이다. 음력 2월과 3월에는 각지에서 참배객이 몰려든다. 또한 윈린 육방마조 화로 건네기 의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참배와 기복, 축하를 위해 순천궁을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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