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 가치
관묘(官廟)적인 특징을 가진 자이 성황묘(嘉義城隍廟)는 오랜 옛날부터 자이 현지 사람들의 신앙 중심지였으며 타이완에서 유일하게 ‘수정후(綏靖侯)’의 봉호를 하사받은 현급 성황묘이다. 취안저우 시디파 장인인 왕진무(王錦木, 1909년~1996년)가 사당의 재건을 주재하였으며 배전의 팔괘 조정과 정전의 입구, 차간의 간가두공(看架斗栱)은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전부 장부를 짜 맞춰 신기에 가까운 장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사당 내의 조각, 채색화, 조소 등은 모두 높은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특히 교지도 작품은 장인들의 예술 경합을 통해 만들어진 ‘대장작(対場作)’으로 서로 다른 예술 유파의 특징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사당 내에는 타이완 전국에서 유일하게 원목을 입체적으로 짜 맞춰 만든 3층짜리 조각 가마인 ‘팔사좌 무교(八獅座武轎)’가 있다. 세밀하고 생동감 있는 조각을 보여주는 매우 귀한 작품이다.
역사 연혁
청나라 초기 타이완의 관할 지역은 1부(府) 3현(縣)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 주뤄현의 관할구역은 타이난시 신스구 이북의 거의 타이완섬 북부 전체 지역에 해당하며, 현청은 주뤄산(현재의 자이시)에 두었고 1704년에 타이완에서 최초로 나무 성을 건설했다. 1715년, 주뤄현의 지현(知縣, 현의 수장)이었던 주종선(周鍾瑄)이 성황묘를 건설했으며 1765년에 재건을 거쳤다. 후에 여러 차례의 민란과 청나라 조정에 대한 반란 사건이 발생했을 때 주뤄가 성을 지키며 공을 세우자 흠차대신(황제를 대신해 밖에서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관리)인 심보정(沈葆楨, 1820년~1879년)이 조정에 성황야에게 칭호를 내릴 것을 주청하였다. 1875년에 광서황제가 자이 성황묘(嘉義城隍廟)를 ‘수정(綏靖)’에 책봉하여 수정후(綏靖侯)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는 타이완에서 유일하게 존호를 부여받은 현급 성황야이다. 후에는 비를 내리는 기적으로 인해 ‘대양현우(臺洋顯佑)’ 현판도 하사받게 되었다. 현재 자이 성황묘(嘉義城隍廟)는 일제시대인 1937년에 재건된 것으로 삼천전, 배정, 정전, 후전 등의 네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후전은 후에 현재와 같은 고층 건물 형태로 바뀌었다. 2015년에 국가 지정 유적으로 등록되었다.
특색 가이드
1‘대양현우(臺洋顯佑)’ 현판
광서제 때인 1887년에 자이 지역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자이현의 지현이었던 나건상(羅建祥, 생몰년 미상)이 비를 기원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마침 자이성 내의 백성들이 베이강의 마조 신상을 성으로 맞아들여 자이 성황묘(嘉義城隍廟)과 둥먼 용신묘에서 동시에 비를 기원하였다. 그 다음 날 고대하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에 타이완 순무였던 유명전(劉銘傳, 1836년~1896년)이 광서 황제에게 주청을 드려 자이 성황묘(嘉義城隍廟)에 ‘대양현우’ 현판을 하사하고 이를 정전에 걸어 기적을 알릴 수 있도록 하였다.
2배전의 팔괘 조정배전의 팔괘 조정은 유명한 시디파 목공 장인인 왕진무(王錦木, 1909년~1996년)의 작품이다. 단 하나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모두 장부와 장부 구멍으로 어지러이 짜인 그물형 두공으로 만들어져, 왕진무가 목조 예술을 통해 표현하려 한 존귀함과 화려한 특징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다. 조정의 네 모서리에는 각각 박쥐 한 마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복을 내린다’를 의미하는 츠‘푸’(賜福)와 박쥐를 의미하는 볜‘푸’(蝙蝠)의 발음이 유사한 데에서 따 온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전체 조정에 조각된 108개의 미륵불, 선녀, 장군 등의 인물 조각 가운데 양복과 넥타이에 수염을 기르고 높은 모자를 쓴 채 지팡이를 쥔 외국 신사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3교지도 대장작
성황묘 배전 수차도의 좌우 양측과 대들보에는 3폭의 교지도 작품이 있다. 각각 타이완 제일의 교지도 예술가였던 섭왕(葉王, 1826년~1887년)의 계승자 린톈무(林添木, 1912년~1987년)와 ‘왕자이푸(尪仔福)’라고도 불렸던 홍쿤푸(洪坤福, 1865년~1945년)의 계승자 천좐유(陳專友, 1911년~1981년)의 대장작(여러 장인이 서로 경합하며 만들어낸 작품)이다. 특히 대들보의 ‘지성전지(至誠前知)’ 현판 아래에 있는 교지도는 린톈무와 천좐유가 절반씩 만든 것으로 매우 귀한 예술 대장작이다. 작품은 매우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만들어져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교지도 작품 아래에는 린톈무의 낙관이 찍혀 있어 당시 완성 후 린톈무의 작품이 원로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사당에서 주는 별도의 장려금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4‘팔사좌(八獅座)’ 가마
2층에 전시된 ‘팔사좌’ 가마는 옛날 성황야가 가마를 타고 행차를 나갈 때 사용하던 것으로 성황묘의 보물이다. 일제시대인 1916년, 중국 탕산의 명장 20명이 아리산의 백양나무를 약 2년 동안 조각하여 완성한 것이다. 가마를 만들 때는 못이 하나도 사용되지 않았다. 가마 앞면에 있는 용 기둥은 원목을 사용해 입체적으로 3층을 조각했다. 가마 몸체에는 문무 판관, 우두마면 장군, 칠야와 팔야, 일야유신(日夜遊神) 등 총 32기의 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매우 세밀하게 조각되어 마치 살아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이 ‘팔사좌 무교(八獅座 武轎)’는 타이완에서 유일한 것이다.
5삼천전 격벽의 석조
성황묘는 일제시대 말, 석조 장식의 수리를 거쳤다. 그중 삼천전 양측 격벽에 있는 석조는 유명한 취안저우 후이안의 장 씨 명장들인 장원화, 장인창, 장진지(생몰년 미상)와 루강의 스톈푸(1911년~1980년)가 함께 완성한 것이다. 특히 ‘점용정(點龍睛)’, ‘치호후(治虎喉)’ 조각은 정밀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있어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6와카(和歌, 일본 시)가 쓰인 대련
성황묘 정전 좌우에는 각각 교지도 방식으로 제작된 와카(일본 시) 대련이 있다. 이는 타이완에 있는 사당 가운데서는 유일한 일본어 교지도 대련으로 일제시대에 설치된 것이다. 당시 성황묘가 철거 위기를 맞자 이를 모면하려는 신도들과 지역 세력가들이 일본 정부와의 좋은 관계를 맺고자 제작한 것이며, 신앙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통치자와 영합해야만 했던 증거를 보여준다.
7주뤄현의 지현, 주종선의 신상
자이 성황묘(嘉義城隍廟)의 감실 첫 번째 줄에는 청나라 시대 관복을 입고 관모를 쓴 신상이 있다. 이는 1714년부터 1719년까지 타이완부 주뤄현의 지현을 맡았던 주종선(1671년~1763년)의 신상이다. 주종선은 지현으로 있으면서 <제라현지(諸羅縣志)>를 집필하였으며, 빈민을 구제하고 학문을 부흥시켰을 뿐만 아니라 성을 짓고 세금을 탕감해 주는 등 선정을 베푼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자신의 녹봉을 기부해 성황묘를 세우기도 했다. 주종선이 지현에서 퇴직한 후 백성들은 어진 정치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그의 모습을 딴 조각상을 만들어 후전 오른쪽 곁채에 모셨다. 후에는 정전 감실로 신상을 옮겼으며 청나라 시대 지방 관리를 섬기는 매우 희귀한 예이다. 자이 성황묘(嘉義城隍廟)가 증명하는 자이와 성황묘 자체의 발전 역사를 고려하여 2014년에 자이시 지정 유물로 선정되었다.
8정전 위의 대형 주판
정전의 천정 아래쪽 대들보에 걸려있는 대형 주판은 1841년에 신도들이 신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헌납한 것이다. 대형 주판을 높이 걸어 놓은 것은 성황야가 모든 사람의 인생에 나타나는 선행과 악행을 세심하고 명백하게 계산하고 있으므로 이것을 보고 감히 나쁜 일을 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것이다.
주의 사항
자이 성황묘(嘉義城隍廟)는 매년 음력 8월 2일 성황묘 탄신일 축제에 가장 붐빈다. 축제와 자이시 퍼레이드는 자이 지방 신도들에게 일 년에 한 번 있는 가장 큰 행사로 7일 동안 매우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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