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 가치
장화 공자묘(彰化孔子廟)는 청나라 초기에 국자감 제도(교육제도)를 가장 온전하게 따른 학교였다. 타이완의 4대 서원 중 하나인 바이샤 서원이 이곳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타이완 중부 지역 문화교육 발전의 중요한 상징이었다. 대성전의 들보 위는 청나라 황제들이 하사한 현판이 많이 걸려있다. 지현(청나라 시대 현의 지사)이었던 양계삼(陽桂森, 생몰년 미상)이 동으로 주조한 대형 종과 옹정제의 ‘생민미유(生民未有)’, 건륭제의 ‘여천지참(與天地參)’ 현판은 높은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대성전의 기단 부근은 무늬 벽돌을 사용하였으며 어로(御路)에는 살아있는 것만 같은 사나운 용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극문 벽에 돌출된 부분에는 꽃과 새가 상감기법으로 조각되어 있고, 영성문의 지붕마루에는 타이완에서 찾아보기 힘든 ‘통천통(通天筒)’ 6개가 위치해 있다. 장화 공자묘(彰化孔子廟)는 이미 없어졌거나 일부분만 남아있는 펑산, 주뤄, 단수이 등지의 공자묘와 비교해 봤을 때 청나라 시기 중엽에 타이완 관청에서 건립한 공자묘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 연혁
장화 공자묘(彰化孔子廟)는 원래 장화현 학교에 소재해 있었다. 장화현은 청나라 옹정제 때인 1723년에 현으로 승격하였다. 1726년, 지현인 장호(張鎬, 생몰년 미상)의 주도로 중국 장저우, 취안저우, 차오저우의 장인들을 초청하고 건축 재료를 타이완으로 운송하여 장화 공자묘(彰化孔子廟)를 건설했다. 1745년, 단수이 동지(同知, 관직 이름)와 장화현 현사(縣事)를 겸직하고 있던 증왈영(曾曰瑛, 1708년~1753년)이 사당 좌측에 바이샤 서원을 건설했다. 1786년, 임상문(林爽文)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명륜당과 학서(學署)가 파괴되었다가 1816년에 명륜당 옛 위치에 문창사를 세우고 바이샤 서원을 재건했다. 1830년에는 이정벽(李廷壁)이 지현으로 귀임해 오면서 공자묘를 재건하도록 했다. 사당의 기단은 2척 2촌(약 66cm)이며, 건물 앞에 용 기둥 2개와 돌기둥 20개를 세웠다. 노대 또한 2척 2촌으로 높여 건설했다. 숭성사(崇聖祠) 옆에는 명환사(明宦祠)와 향현사(鄉賢祠), 제기 창고, 악기고를 만들어 현재 공자묘의 규모와 구도를 완성했으며, 일제시대에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바이샤 서원을 철거하였다. 공자묘는 2차 대전 후 두 차례의 재건을 거쳤고 1983년에 국가 지정 유적으로 등록되었다.
특색 가이드
1사진삼원(四進三院)식 건축 구도
장화 공자묘(彰化孔子廟)는 대성문 극문, 대성전, 숭성사로 이루어진 사진삼원(四進三院, 건물 4채와 중간 뜰 3개가 일자로 배열된 구조)식 건축 구도를 가지고 있다. 이 건축 구도는 1830년에 재건을 거칠 때 확정된 규모이다. 공자묘의 공간 배치는 중국의 문묘와 비슷한데, 명륜당을 대성전 왼쪽에 만들고, 명륜당이 있는 곳에 숭성사를 설치한 것은 중국 장저우와 취안저우의 전통 학부 설계이다. 하지만 대성전 뒤 숭성사 양측에 향현사와 명환사를 지은 것은 타이완의 학부 건축 양식을 따른 것이다.
2영성문(櫺星門)
공자묘의 대문인 영성문은 5개간(큰 기둥으로 5개의 공간을 분리해 놓은 것)의 건축 구도를 가지고 있으며 지붕은 3단식 연미(燕尾) 지붕이다. 영성은 하늘의 문성(文星)을 가리키는데, 문성이 인간 세계에 내려와 공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에 공자묘의 대문을 영성문으로 명명한 것이다. 일반적인 사당과는 다르게 문에는 수문신이 그려져 있지 않으며, 옛 방법을 따라 108개의 장식용 못을 사용해 문을 장식했다. 장화 공자묘(彰化孔子廟) 영성문의 지붕마루에는 죽통 모양의 ‘통천통’ 6개가 있어 일반적으로 2개의 통천통을 가지고 있는 다른 공자묘와 차별성을 보인다. 지붕 위에 통천통을 세우는 것은 존경과 숭배의 의미가 있는데, 공자의 덕이 천지와 조화되며 그의 도가 고금을 막론하고 일관적이라는 점을 상징하고 있다. 입구 양쪽에 있는 포고석(抱鼓石)은 나선형의 문양이 매우 정교하게 세공되어 있으며,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인 초도(椒圖)의 모양을 따서 만들었다. 초도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거처에 들어오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고 알려져 있어 문 입구에 사용된 것이다.
3‘하마비(下馬碑)’와 ‘만인궁장(萬仞宮牆)’ 와비(臥碑)극문 왼쪽에 있는 ‘하마비’ 위에는 만주어와 중국어로 ‘문무관원과 군인, 백성은 이곳에 이르면 말에서 내리시오’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이는 공자묘를 지나는 관원들과 백성들이 말에서 내려 걸어가도록 알려주는 것으로 공자에 대한 높은 존경심이 드러나 있다. 오른쪽에 있는 ‘만인궁장’ 비석은 <논어>의 ‘부자지장수인, 부득기문이입(夫子之牆數仞, 不得其門而入)’을 인용한 것으로, 공자의 높은 덕과 학문을 형용한 글귀이다.
4극문(戟門)
장화 공자묘(彰化孔子廟)의 두 번째 문은 극문(대성문이라고도 함)으로, 이는 타이완의 공자묘 가운데서 가장 처음 세워진 것이다. ‘극(戟)’은 고대 중국의 무기 이름인데, 극문은 무장이 이곳에 오면 공자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무기를 문 옆에 내려놓아야만 공자묘의 대전에 들어갈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극문 양쪽의 벽돌벽에는 타이완 사당에서는 보기 힘든 정교한 벽돌 조각이 있는데 이 또한 장화 공자묘(彰化孔子廟)만의 특색이다. 조각에 새겨진 모란과 꽃병 그림은 부귀와 평안을 의미한다. 극문 지붕마루 위에는 ‘용두어미’ 모양의 ‘이문(螭吻)’이 있는데, 이문은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이문은 물을 뱉어 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를 지붕 위에 놓는 것은 재화를 피한다는 의미가 있다. 극문 안쪽에는 1811년에 주조된 ‘용종(鏞鐘)’이 있으며, 종 표면에는 ‘대군창읍(臺郡彰邑)’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극문 양쪽의 원형 문은 본래 수리를 거치기 전에 팔각형이었으며 ‘예문(禮門)’, ‘의로(義路)’라고 불렸다.
5대성전
대성전은 대성문과 숭성사가 건설되어 연결되기 전에는 독립된 건물이었다. 대성전 중앙은 감실이며 화조(花罩), 가로대인 탁목(托木), 반용(蟠龙) 기둥과 함께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가로로 5개간 넓이인 정전은 겹처마 헐산식(簷歇山, 네 면으로 만들어진 지붕 위에 지붕 한 층이 더 올려져 있는 형태로 존귀함을 상징함) 지붕을 가지고 있으며, 개방식 복도가 정전의 네 면을 둘러싸고 있다. 대성전 앞 월대는 공자에 제사를 드리는 신성한 공간이다. 대성전 내부에는 청나라 시대 황제들이 하사한 오래된 현판들이 소장되어 있는데 각각 옹정제의 ‘생민미유(生民未有)’, 건륭제의 ‘여천지참(與天地參)’, 가경제의 ‘성집대성(聖集大成)’, 함풍제의 ‘덕제주재(德齊幬載)’, 동치제의 ‘성신천종(聖神天縱)’ 등의 현판이다.
6대성전 기단 옆면의 장식대성전 기단 옆면에는 매우 독특한 청나라 시대의 벽돌 문양이 있다. 이는 벽돌 일부가 돌출되도록 쌓은 후 오목한 부분에 석회를 채워 벽돌 도안이 두드러지게 한 것으로, 네 가지 도안은 각각 ‘만자반장(萬字盤長)’, ‘향로’, ‘옛날 화폐’, ‘귀갑’으로 모두 상서로움과 부귀의 의미를 담고 있다.
7대성전 앞의 용 기둥대성전 앞에 있는 용기둥은 1830년, 공자묘를 재건할 당시의 작품이다. 화강암을 재료로 사용하였으며 용 한 마리가 각 기둥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다. 왼쪽 기둥의 용은 입을 벌리고 있고, 오른쪽 기둥의 용은 입을 닫고 있으며, 네 발은 구슬을 움켜쥐고 있어 매우 특색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투조 기법을 일부분 사용하여 입체감을 주었다.
주의 사항
개방 시간은 8:30부터 17:00까지이다. 대문은 보통 평일에는 닫혀 있으며 9월 28일, 석전대제가 열릴 때 연다. 참관객들은 옆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선거 및 명절, 국경일에는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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