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관 가치
인해궁은 청나라 도광 시기(1821~1850)에 이미 중리, 핑전, 양메이 지역 13개 마을 하카 주민들의 중요 신앙 중심지였다. 일제시기에 황민화 운동으로 인해 타이완의 사당들이 철거되는 위기를 맞았지만 인해궁은 중리 지역에서 유일하게 철거를 모면하고 보존된 전통 신앙 사당이었다. 이로 인해 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사당 옆 성석정은 풍부한 역사 문화와 하카 부족의 인문적 특성 및 의의를 지니고 있으며 농사와 교육 모두를 중시하는 문화의 전형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쇼와 시기(1926년~1989년)에 있었던 마지막 재건 때, 당시에 유행하던 자갈박이자갈박이 모르타르 마무리 벽면과 바로크 장식의 예술적 특색이 외관에 융화되었으며 타이완 전국에서 유일하게 일제시기의 문화가 융합된 건축 스타일의 성석정을 가지게 되었다.
역사 연혁
1826년에 창건된 중리시 인해궁은 신가묘(신제먀오, 새 거리 사당)라 불리기도 하며, 타오위안시 중리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사당이다. 중리는 청나라 도광시기(1821년~1850년)에 신제(新街, 새 거리)와 주제(舊街, 옛 거리)로 나누어졌는데, 날이 갈수록 신제가 번영하고 인구가 증가하자 중리, 핑전, 양메이의 13개 마을 주민들이 연합하여 이 사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관세음보살만을 모셨는데 후에 상인들의 왕래가 빈번해지자 1828년 베이강 조천궁에서 마주신을 분령해 와 사당의 주신으로 모셨다. 일제시기인 1936년, 일본 정부가 황민화 운동을 실시하자 중리 군수였던 미야자키 나오카츠(생몰년 미상)가 사당들의 철거를 진행했는데, 인해궁은 예전에 오랜 병을 앓고있던 기타시라카와 요시히사(1847년~1895년) 친왕을 묵게 했던 적이 있어 철거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인해궁은 총 5차례의 재건을 거쳤는데, 2009년에 지어진 4주 3문의 패루는 중리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사당에서 50m 떨어진 곳에 있는 성적정(聖蹟亭)은 청나라 말기에 지어진 것으로 후에 일제 쇼와시대에 재건되었다. 이로 인해 당대의 자갈박이자갈박이 모르타르 마무리 벽면식 건축 특징이 녹아들었으며, 다이쇼 시기(1912년~1926년)에 유행한 바로크풍 조각 장식도 가지게 되었다.
특색 가이드
1인해궁의 삼전식 건축 구도
인해궁의 건축 공간 구조는 중국 남방의 전통 건축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사당 앞에 독립적으로 배치된 산문은 4주 3문의 외형을 가지고 있으며 화려한 겹처마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용마루 중앙에는 화주(火珠)가 놓여져 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좌우의 쌍용이 이를 지키며 불을 평정하고 있다. 이는 중리구의 주요 랜드마크가 되었다. 산문 뒤편의 광장인 묘정(廟埕)은 삼천전과 배전, 정전, 후전, 동서 양쪽의 곁채를 포함한 삼전식의 사당 건물까지 이어진다. 삼천전의 정척(중국 고대 건축물에서 대들보 최상부에 있는 가장 높은 부분, 용마루)에는 쌍용이 복(福), 록(祿), 수(壽)의 세 신선을 보호하고 있는 모양의 젠녠 장식이 있으며, 서시척(정척 위에 설계된 장식) 또한 젠녠 장식으로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정전의 정척에도 쌍용 호탑이호탑이 표현되어 있다.
2‘해국장춘’과 ‘자열보제’ 현판인해궁은 흙벽과 흙기와로 조야하게 지어진 관계로 청나라 도광시기인 1838년에는 바람과 비로 벽이나 담이 파손되기도 했다. 따라서 1870년, 민중들이 사당을 재건하기로 결의하였으며 상생(庠生, 중국 명청시대 부, 주, 현의 학생들을 부르는 별칭으로 생원 및 수재를 가리킴)인 왕궈화가 재건 사무의 책임을 맡았다. 왕궈화는 다음 해 사당 재건이 완료되자 ‘해국장춘’ 현판을 봉헌하였으며, 당시 중리중리 마을의 신도들 또한 ‘자열보제’ 현판을 봉헌하였는데 두 현판 모두 현재 정전 높은 곳에 걸려있다.
3성적정(聖蹟亭)
인해궁에서 왼편으로 50m 정도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성적정(聖蹟亭)은 청나라 말기에 건설된 것으로 후에 일제 쇼와시대에 재건되었다. 당시 중리에서는 신제가 가장 번화하고 상업도 활발했는데 많은 유력인사와 학자들이 끊이지 않고 모여들어 많은 인재와 문화가 집중되었다. 하카 사람들은 하늘과 문자에 대한 숭상의 전통을 표현하기 위해 인해궁에 성적정(聖蹟亭)을 짓고 망가진 책이나 불필요해진 종이들을 소각할 수 있게 했다. 높이가 약 4.33m에 달하는 성적정의성적정(聖蹟亭)의 내부는 벽돌로 지어졌으며 외부는외부는 자갈박이 모르타르로 표면을 마무리하였다. 성적정은 성적정(聖蹟亭)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상단은 육면체 모양이다. 정면에는 ‘성적(聖蹟)’이라는 두 자가 조각되어 있으며, 아치형의 처마 끝을 가지고 있다. 지붕은 화병 모양을 하고 있다. 중간층은 사면체로, 정면에 타원형의 화로 입구가 나 있는데 주위를 돌아가며 복잡한 바늘땀 모양의 장식이 되어있고, 복(‘푸’라고 발음함)과 발음이 비슷한 박쥐(볜‘푸’라고 발음함)의 모양을 한 장식이 있다. 가장 마지막 층은 팔면체 모양이다. 일제 시기에 재건을 하면서 당시 일본 건축 스타일의 영향을 받아 자갈박이자갈박이 모르타르로 마무리 하였고 바로크 형식의 장식 특징인 훈장 문양 장식(카르투슈) 등이 융합되었다. 이는 타이완 전국에서 유일하게 바로크 장식 풍으로 꾸며진 성적정(聖蹟亭)으로 일제시대의 문화 융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으며 현재 타오위안시 지정 유적이다.
주의 사항
인해궁의 회란(回鑾) 행차는 매년 음력 10월부터 12월 사이 농한기에 진행된다. 회란은 베이강 조천궁에서 조상을 뵙고 향을 올리는 것은 물론 13개 마을을 행차한다. 이는 중리 지역에서 가장 성대한 종교 활동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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